"풀들은 가장자리를 좋아하나 봐." O가 말했다. 걷고 있던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섰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주위를 살펴보니, 길가의 가장자리를 따라 풀들이 일렬로 솟아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O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소름이 돋았다. 사실 소름이 돋을 필요가 없었다. 풀들은 어디에서나 주로, 가장자리 혹은 경계에서 자란다. 당연한 것을 오래도록 생각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왜 그럴까. 왜 그럴까. 왜 풀들은 가장자리에서 자라날까.
그러다, 아- 내가 이 길을 밟고 있어서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다. 중심에서 자라나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짓밟아 버릴 때가 많다. 발걸음을 내디딜 길이 평평했으면 좋겠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넘어질까 걱정하고 싶지는 않다. 잘 걷고 싶다. 당장 잘 걸으려고 수없이 많은 것들을 중심에서 밀어낸다. 밀려난 것들은 점점 밖으로 밀려 가장자리까지 가서 자라난다. 아- 너무 많은 것들을 밀어내 버렸나.
문득 앞에 깔린 길이 너무도 엉성해 보인다. 이 엉성한 길에 한 걸음을 더 내디디면 나는 쑥- 하고 빠져버릴 것 같다. 어떡하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살펴본다. 가장자리에 자라난 풀들을 따라 쭉 걸어볼까. 눈으로 풀들을 따라가 본다. 1초 2초 3초 ……. 어라, 계속 있다. 몸을 한 바퀴 뺑 돌린다. 가장자리를 따라 자라난 풀들이 계속 이어져 테두리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동시에 왠지 모를 안정감과 벅찬 마음. 밀어낸 수많은 것들은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구나. 가장자리에서 꿋꿋이 자라나고 있구나. 나를 감싸는 테두리가 되었구나.
가장자리 혹은 경계로 밀려났지만, 그곳에서 계속 자라나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주로 자연물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조명하고, 품고 있는 힘을 시각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한다. 생태학적으로 인간은 자연에 속한 존재이며, 물리적으로도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나 자연물이 있다. 하지만 각자가 서 있는 곳이 중심이라면, 중심을 제외한 ‘주변’에 자연물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편리 혹은 시각적 아름다움을 위해 사람이 다니는 길 위에서는 제거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 당장 나아갈 길 위에서의 효율과 안정을 위해 옆으로 제쳐놓은 것들이 많다. 전시장에는 중심이 아닌 주변에 존재하고, 그곳에서 자라나는 것들의 이미지들을 모아두었다. 이곳에서 발견한 소박하지만, 힘을 품고 있는 자연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각자가 제쳐놓은 것들 또한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음을 믿게 되길 바란다. 또한, 가장자리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들이 점점 중심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