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240~242쪽. 원문) 쥐산의 북동쪽에 위치한 염창동은 강가에 작은 포구 마을 이었으며, 서쪽 계곡에는 농가들이 산재해 있는 한적한 마을 이었는데, 염창동 아래 계곡에서 듯하지 않은 이변이 일어나면서부터 귀신 바위라는 전설이 생겨나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처럼 양천 지역은 이상스럽게도 바위에 관한 전설과, 설화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서 아주 이채로운 지역이 아닐 수 없다.. 옛날 어느 때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날 맑게 개인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일어나고 사방이 캄캄하여졌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흙먼지가 흩날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으며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갔다. 이 때 마을의 한 농민이 집단속을 하려고 밖에 나갔다가 이상한 일을 발견하고 놀라서 크게 외쳤다. 그것은 집채만한 큰 바위가 한강 위쪽에서 마을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뿌연 먼지 속이라 똑똑히 볼 수 없지만 큰 바위 덩어리인 것은 분명하였다. 모두들 뜻밖에 평생 처음보는 일이라 놀라고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염창동까지 와서 하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183~189쪽. 원문) 칼바위는 시흥 2동을 둘러싸고 있는 관악산 분기점인 삼성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바위 모양이 칼처럼 생겨 칼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이 칼바위에는 100가지의 전설이 서려 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그 많은 전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물론 그와 같은 일은 구전자가 있어서 이 많은 전설을 다 아는 사람이 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죽고 만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구전되는 전설은 유일하게도 그 많은 전설 중에서 딱 한가지의 다음과 같은 전설이 구전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전설의 특징은 어느 시대, 어떠한 대감, 종의 이름 등 모두가 미명으로 밝혀지지 않았음이 칼바위 전설에 걸 맞는 전설이 되기도 한다. 옛날에 어느 대감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당파 싸움을 하다가 끝내는 자신의 파가 그 싸움에서 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해서 결국 자신이 속해 있던 모든 패자들의 일파는 참혹하게 제거되기 시작했고, 자신도 역시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영감으로 알고 있으니, 온 가문에 큰 화가 떨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166~167쪽. 원문) 서울 마포구 창천동에 있는 와우산은 그 산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 소리와 농바위 부근의 저녁 짓는 연기 모습이 서호 팔경으로 이름난 곳이다. 이 산은 9•28 수복 때 공산군과 아군간에 2,000여명의 사상자를 냈던 전격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 곳은 서울의 발전 초기에 살기 좋은 아파트 건립의 시범 지역이기도 했으나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으로 33명의 인명을 잃었고 40명이 부상을 당하는 큰 사건이 발생했던 곳으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곳이다. 와우 아파트의 이름이 된 와우산은 서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음으로 와우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풍수 설화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전에 큰 소가 있었는데 등에 짊어진 질마는 무악산에다 벗어 놓고 ‘질마재’ 굴레는 북아현동에 벗은 다음 ‘굴레방다리’서강에 내려가서 물을 마시고 이 곳에 누웠다는 것이다. 이 소가 여물을 먹는 쉬죽통은 하수동에 있던 ‘농바위’이고 ‘잔돌맥이’는 이 소의 쇠똥에 비유되었다고 한다. 그처럼 묵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161~162쪽. 원문) 조선 초기까지 한성부 북부의 의통방의 관할 구역으로 선혜청의 넓은 창고가 있었음으로 해서 유래된 지명은 평창동이다. 이 곳은 비교적 고지대에 속하는 산지이며, 자연이 좋은 곳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 일대는 오늘과 같이 주택들이 들어서기 이 전에는 유원지로서 서울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었던 곳이다. 이 곳은 1965년 5월까지 서대문구에 속했던 지역이었으나 1975년 10월 구 관할 구역 변경이 있을 때 서대문구에서 종로구 평창동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곳은 삼각산의 정상이 가까운 곳까지 바위와 골짜기들의 이름이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오늘의 이 곳은 그 옛날에 풍치 좋은 곳들이 모두가 주택지로 변화했지만 그런대로 그 형태들은 남아있다. 1973년 서울 특별시 민속 자료 제 3호로 지정된 ‘보현산신각’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여산신각’이 있다. 또한 평창동의 정상에서 굽도는 곳에 크고 작은 봉우리 2개가 이어져 있다. 이 봉우리를 형제봉이라고 한다. 큰 봉우리는 형의 봉우리이며, 작은 봉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150~151쪽. 원문) 서울 성동구 성수동에 있는 뚝섬은 한자로 둑도라고 쓰며 , , 또는 라고도 불렀다. 이 곳은 중랑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중간에 있어 을 이루고 있다. 전에는 평야 지대에서. 풀과 버들이 무성하였고, 조선 초부터 나라에서 말을 먹이는 목장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인근에 경마장이 들어서 있으니 예나 지금이나 말과는 인연이 깊은 곳이다. 이 곳은 살꽂이벌이란 유래와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태조 때부터 임금의 사냥 장소로 되어 태조~성종 때까지 백 여 년동안 임금이 직접 나와서 사냥한 것이 151회나 되었는데, 임금이 나오면 의례히 그 상징인 둑기를 꽂았으므로 이곳을 뚝섬, 뚝도라 부르게 되었고, 군사들이 활솜씨를 겨루는 등의 무예를 사열하던 곳이므로 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이 곳은 또 동쪽에 있는 들판이므로 동교라고도 하였다. 고려 현종 때 강감찬이 한양 판관으로 있을 때였다. 한강 부근에 호랑이의 피해가 심하여 한양 부윤이 크게 걱정하는 것을 보고 강감찬이,“3~4일이면 모두 없애겠으니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111~114쪽. 원문) 도봉구 미아동 108번지(미양국민학교 위 능선)에는 거북이의 형상을 한 웅장한 검은 바위가 있다.이 바위의 전설이 바로 거북바위의 전설이며, ‘미아동’의 지명도 이 거북바위로 하여금 얻어진 이름이라고 전해 온다. 옛날에 바다의 용왕이 ‘육지가 어떻게 생겼으며, 살기는 어떠한가?’ 한 번 알고 싶은 마음에서 가장 모험심이 강한 거북이 한 쌍을 육지로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용왕이 특사 자격으로 바다에서 한강수를 역류로 하여 육지로 올라온 이 거북이 한쌍은, 용왕이 후원하는 크나 큰 위력의 힘을 안고, 서울 거리를 엉금엉금 기어서 서울 사람들을 놀라게 해 놓고는, 다시 인왕산으로 기어 올라서 길게 뻗은 북한산 정상길을 제놈들이 마음대로 휘저으며, 육지의 모든 자연을 두루 구경하고 다니다보니, 한 쌍의 거북이는 서로 길을 잃게 되었으나, 약빠른 암거북이는 제놈이 온 길을 잘 알아서 다시 바다로 돌아갔는데, 이 우직한 숫거북이는 용왕의 힘만 믿고, 삼각산, 인왕산, 북한산, 도봉산의 산신령들이 지켜 보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96~98쪽. 원문) 매봉산의 전설 (황소 머리 대동제)매봉산은 도봉구와 노원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행정구역은 노원구에 속한다. 이 산의 동남쪽으로는 염광 여상이 자리 잡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인덕 전문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서편으로는 남북을 가로지른 산 고갯길을 경계로 추한산이 자리 잡고 있다.이 두 산의 전설과 함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연 부락인 안골마을 이 매봉산 자락춤에 추한산을 등지고 있다. 서울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연 마을이기도 하다. 전설의 구전자도 이 마을 에서 고옥을 지니고 살고 있으며, 원주민으로서 유일한 구전자이다. 그러나 이 자연 부락도 재개발 지역으로 없어지게 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즉 이 매봉산의 전설은 심술궂은 추한산의 산신과 인정많은 매봉산의 산신이 서로 싸웠다는 줄거리의 전설 이야기이다. 옛날에 안골마을에 사는 목동이 매봉산 중턱에서 큰 황소에게 풀을 뜯기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큰 칼이 황소의 등에 곧장 꽂히고 말았다. 이 칼은 매봉산의 맥을 끊어 놓으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63~64쪽. 원문) 한양 서울을 이 곳에 정한 지 얼마 안 되는 수백년 전 한 성판윤인 박창선씨의 선대 할아버지들 중에서 아주 효성이 지극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다.박씨는 선친을 여의고 난 뒤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한성의 자기 집에서 무악재 고개 너머에 모신 선친의 묘소에 참배하였다고 한다.어느 날인가는 집안에 바쁜 일들이 있어서 낮에 참배를 하지 못하고 해가 저물어서야 박씨가 선친의 묘소를 향해서 집을 나섰다.무악재 고개에 다다르자 칠흑같은 어둠이 덮여 있는 숲 속에서 갑자기 송아지 만한 큰 호랑이가 눈에 불을 켜고 나타나 앞을 가로 막았다.박씨가 깜짝 놀라 황급한 마음을 가다듬고, 대담하게 큰 소리로, “이봐라, 나는 선친의 산소에 가는 길이니, 나를 잡아 먹으려거든 잡아 먹어라.” 하고 호랑이에게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은 호랑이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뒷걸음질을 하더니 꼬리를 살살 흔들면서 다시 박씨 앞으로 와서는 고개를 돌리면서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박씨는 겁에 질린 채 호랑이 등에 탔다. 박씨를
출처: 송인성,『서울정도 600년 기념 서울의 전설 60선』(재판, 학술자원공사, 1994), 39~41쪽. 원문) 아주 오랜 옛날 삼국 시대부터 조선조 오백 년 동안 절대적인 왕정의 통치하에도 임금님이라 할 지언정 모든 일응ㄹ 매사에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다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임금님의 통치력에 의하여 국정을 이끌어 가는 데는 많은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으나, 나라의 주인이며, 문안의 구중궁궐이 자기가 거처하는 최상의 통치자라 해도 자신이 가야하는 왕도가 있었으므로, 그 길은 절대적으로 이탈하지는 못했다. 즉 그 왕도라 함은 선대들의 왕들로부터 면면히 이어온 예절과 왕으로서의 근엄한 기풍과 체통을 말함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여러 중신들의 여론으로 하여금 임금님의 신변을 위한 절대적인 찬동으로 가결된 일들은 즉 국법으로서, 임금님도 그 국법에 따라야 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국벅을 따르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음과 같은 전설이 바로 임금님과 연계되는 치마바위의 전설이다. 종로구 옥인동에서 인왕산을 쳐다보면 병풍바위 밑에 오뚝한 바위가 하나 서 있다. 이 바위를 그 옛날부터 “치마바위”라고 불러왔
출처: 한국문화원연합회 웹사이트 지역N문화>지역과 역사>이야기자료>서울•경기•인천 지역의 전설 이야기 정리) 옛날에 나무를 하루에 한 짐씩 해서 가족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죽만 먹다 보니 밥도 먹고 싶어져서 나무를 두 짐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무 한 짐을 쌓아 놓고, 다른 한 짐은 시장에 팔러 갔다 왔는데, 집에 와 보니 나무둥치가 사라져 버렸다. 다음 날에는 누가 나무를 훔쳐가는지 확인하려고 나무둥치 안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나무둥치가 하늘로 올라가 옥황상제 앞에 가게 되었다. 옥황상제는 나무꾼에게 “당신의 복은 하루에 나무 한 짐 할 만큼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무꾼이 “내 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옥황상제는 하늘을 가리키며 보라고 했다. 보니 조그만 복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달처럼 큰 복덩어리가 있었다. 나무꾼이 “저 큰 복은 누구의 복입니까?” 하고 묻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석숭이라는 아이의 복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무꾼은 석숭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그 큰 복을 잠시 빌려가고 싶다고 부탁했고, 옥황상제는 허락했다. 그리하여 나무꾼은 땅으로 내려와 보니 집과